[사이언스 카페] 게임 중독이 질병? 약 줄 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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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혼자 못하는 컴퓨터 작업… 게임으로 만들어 일반인이 도와
단백질 해독·뇌지도 작성 등에 고졸자부터 노인까지 대거 참여… 오래할수록 질병 치료에 도움돼


나뭇가지들이 이러 저리 얽혀 있다. 붉은 점이 반짝이는 부분의 가지를 커서로 이리저리 돌리다가 한 방향이 되자 폭죽이 터지고 점수가 올라간다. 미국 워싱턴대 연구진이 개발한 단백질 구조 탐색 게임인 '폴드잇(Foldit)'의 한 장면이다. 나뭇가지는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들이다. 방금 게이머가 커서를 한 번 옮기면서 과학자들이 밝혀내지 못한 단백질 구조가 해결됐다.

워싱턴대 연구진은 지난 6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일반인들이 컴퓨터 게임을 통해 세상에 없던 새로운 구조의 단백질을 설계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단백질은 인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명 현상에 관여한다. 여기에 꼭 들어맞는 새로운 단백질을 만들면 질병을 치료하는 신약이나 유용 물질을 만드는 산업용 효소가 될 수 있다.

미국 워싱턴대 연구진이 개발한 단백질 구조 탐색 게임 '폴드잇'(화면 안). 나뭇가지 모양의 아미노산을 옮기며 가장 적합한 단백질 구조를 찾는 게임이다. /사진=미국 워싱턴대, 일러스트=박상훈

컴퓨터 게임이 단백질 해독은 물론, 뇌지도 작성과 유전자 분석, 양자컴퓨터 개발에까지 이용되고 있다. 과학자 혼자서 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컴퓨터 작업을 게임으로 만들어 일반인들이 과학 연구에 기여할 길을 열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달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했지만 과학 연구용 '착한' 게임은 오래 할수록 질병 치료에 도움이 된다.

◇고졸·노인 게이머들이 단백질 설계

폴드잇은 2008년 개발됐다. 단백질은 20가지 아미노산들이 입체적으로 연결된 형태에 따라 기능이 달라진다. 아미노산의 연결 형태가 워낙 다양해 원하는 단백질 구조를 확인하려면 컴퓨터로도 엄청난 시간의 작업이 필요하다. 폴드잇은 게이머들의 집단 지성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2011년에는 10년간 과학자들이 풀지 못하던 에이즈 관련 단백질 구조를 폴드잇 게이머 6만명이 10일 만에 해결했다.

연구진은 이번에 폴드잇의 새 버전을 선보였다. 과거에는 인체에 이미 있는 단백질 구조만 해독했는데 새 게임에서는 자연에 없던 구조도 얼마든지 설계할 수 있도록 했다. 연구진은 게이머들이 설계한 단백질 중 56개를 실험실에서 합성해 실제로 안정적인 구조를 유지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번 단백질 설계 대회에 참여한 게이머 324명 중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은 20% 미만이었고 고졸이 24.6%였다. 65세 이상의 노인도 9.5%나 됐다. 하지만 브라이언 콥닉 워싱턴대 연구원은 "게이머들이 만든 단백질은 박사급 과학자가 만든 단백질과 비교해 절대 수준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시각 정보에 강한 인간의 장점 활용

과학 연구용 게임은 계산은 컴퓨터가 앞서지만 시각 정보 인식은 사람이 낫다는 점을 이용했다. 실제로 흘려 쓴 글자는 컴퓨터보다 사람이 훨씬 빨리 인식한다. 미국 코넬대 연구진은 2016년 생쥐의 뇌 현미경 영상에서 혈액 흐름이 끊긴 곳을 찾는 '스톨 캐처스(Stall Catchers)'란 게임을 개발했다. 뇌에서 혈액이 제대로 흐르지 못하면 알츠하이머 치매를 유발할 수 있다. 일반인들은 게임에서 뇌 영상을 분석해 알츠하이머 치매 연구를 도울 수 있다.

앞서 프린스턴대의 한국인 과학자 세바스찬 승(한국명 승현준) 교수는 생쥐 망막의 신경세포 연결망을 찾는 게임인 '아이와이어(EyeWire)'를 개발했다. 2014년에는 KT와 함께 게임 한국어 버전도 만들었다. 당시 승 교수는 "게임에 강한 한국인들이 뇌 연구에 더 많이 기여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지난해 승 교수는 한국뇌연구원 김진섭 박사와 함께 국제학술지 '셀'에 아이와이어 게임 데이터를 기반으로 생쥐의 망막에서 눈과 뇌를 연결하는 47가지 시각 통로를 찾았다고 발표했다.

게임 형식도 다양하다. 캐나다 맥길대 연구진은 테트리스 게임 형식으로 질병 유전자를 해독하는 '파일로(Phylo)'를 개발했다. 게이머들은 블록 형태로 제시되는 유전자 서열에서 위치가 잘못된 부분을 찾는다. 이 방식으로 2년에 2만명이 35만건의 유전자 해독 오류를 찾아냈다. MIT 연구진은 낱말 맞히기 게임인 수도쿠 형식으로 양자컴퓨터의 오류를 찾는 '디코도쿠(Decodoku)' 게임을 개발했다.

컴퓨터 게임은 1958년 10월 미국 국립브룩헤이븐연구소에서 공개한 '테니스 포 투(Tennis for Two)'에서 시작됐다. 당시 연구소 과학자가 어려운 물리학을 대중에게 설명하려고 공의 궤적을 게임 형태로 시각화했다. 60년이 지난 지금은 게임이 과학을 도우러 나섰다. 영국의 과학 연구용 게임 사이트 운영자인 클레어 바에트도 게임 산업에서 10년간 종사하다가 과학으로 경력을 바꿨다. 그는 "게임 설계를 이용해 일반인들이 과학 연구를 더 오랫동안 할 수 있도록 하며 과학 연구를 지원하는 커뮤니티도 형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y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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