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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연아 연기 보기가 불편했던 이유"

[삼성을 생각한다] '고품질' 제품 뒤에 숨은 '저품격' 경영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가 다양한 논란을 낳고 있다. 주요 언론은 삼성 관련 칼럼 게재를 거부하는가 하면, 심지어 김 변호사의 책 광고까지 거부했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삼성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1등 기업 삼성은 왜 공포의 대상이 됐을까. <프레시안>은 독자들로부터 삼성에 관한 다양한 생각을 듣는 기획을 마련했다. <삼성을 생각한다> 독후감을 포함해, 삼성과 이건희 전 회장이 우리 사회에 남긴 숙제에 관한 내용이라면 누구의 글이건 소개할 계획이다. 독자들이 삼성을 생각하는 글은, 이 메일 주소 mendrami@pressian.com로 보내면 된다. <편집자>

대한민국 엘리트의 자발적 복종 대상, '삼성'

아마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이 지난 2월 5일 자신의 선친인 이병철 삼성 창업주 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 거짓말 없는 세상이 돼야한다"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삼성'에 관해 '뭔가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내게 다시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훈계는 설사 그럴 자격과 권능이 있는 이가 정말 죄 지은 사람에게 하더라도 자신을 한 번쯤 돌아보지 않고는 그렇게 당당하게 입 밖에 내기는 힘든 언사일 것이다.

하지만 속에서 치미는 역겨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의 광고가 온갖 언론에서 거절당하지만 않았더라도, 별 효과는 없을 수도 있겠지만 '삼성'을 상대로 '이제는 뭔가 해야 한다'는 섣부른 의지를 우려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의 광고 거절에서 내게 아주 심각하게 느껴진 문제는, 이 책의 광고를 거부하도록 삼성 측에서 명백한 압력을 행사했다는 정황이 거의 인지되지 않는 상태에서, 관련 매체들이 '알아서 자발적으로 거절'했다는 점이다.

아주 뜻밖에도 <경향신문>에서 이 책을 다룬 김상봉 교수의 칼럼을 게재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을 김 교수 자신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나는 그 전언에서 삼성이 <경향신문>에 김 교수의 칼럼을 싣지 않도록 압력을 가했다는 얘기를 전혀 듣지 못했다. 그런데 <경향신문>은 삼성 측으로부터 그런 명시적 압력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발 우리 사정도 감안해 달라"는 통사정과 함께 김 교수의 칼럼을 '알아서 자발적으로 거절'할 수밖에 없다는 의사를 전했다. <경향신문>의 정기 기고자임에도 불구하고 원고를 거절당하자 <프레시안>과 <레디앙>으로 원고 망명을 감행한 김 교수의 글을 나는 그 뒤 <프레시안>에서 뒤늦게 읽을 수 있었다.

도무지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이는 이 글을 실었다고 해서 신문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내 식견으로는 통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손발이 저리도록 내 몸이 잦아드는 공포의 내용은 평소 내가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하고 바랐던 두려운 사태 그 자체였다. 즉 이제 삼성은 대한민국 시민 전체는 아니더라도 여야와 계층을 막론한 한국 사회의 지배 엘리트와 여론 주도층이 알아서 자발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최강권력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공론장의 저변인 시민대중은 몰라도 제도권과 비제도권,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망라한 공론장의 주도체들은 이제 삼성이 손수 손보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이 삼성에 대한 공포때문에 알아서 자발적으로 삼성에 기어주게끔 돼 있다는 것이다. 삼성은 이제 대한민국 사회와 정치, 그 모든 권력관계에서 확실하게 비폭력 패권, 즉 헤게모니를 장악한 듯이 보인다.

평소 나는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정도를 걷고 있는 <경향신문>을 전혀 돕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부채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김 교수의 글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그 사정의 통절함에 대해 "<경향>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는 김상봉 교수의 심정에 글자 그대로 동감했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김 교수의 글을 알아서 거절한 그 충정을 인정받아 <경향>이 삼성으로부터 광고나 듬뿍 수주해 그 어려운 경영난을 타개했으면 하는 바람까지 보태었다. 내가 키우지 못하는 내 자식이 평소 마뜩치 않게 여겨왔던 남에게라도 밥숟가락 얻어먹고 호시절 올 때까지 살아남기나 했으면 하는 애타는 부모 심정이라고나 할까.

무위로 돌아간 철학자들의 성명

어쨌든 이런 일로 인해 나는 내 일정상 한참 뒤에나 읽었을 김용철 변호사의 책을, 그것도 동네 서점에서 주문해서 조기에 사들여 읽었다.

나는 거기에서 2007년 10월에 있었던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에 210명에 달하는 철학계 인사들이 호응하여 '전국철학앙가주망네트워크(PEN)'의 이름으로 같은 해 11월 19일 아침 소공동의 삼성 본관 앞에서 닥쳐오는 초겨울의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철학의 이름으로" 발표했던 선언과 요구(☞ 바로 가기)가 그 뒤 2년 동안 어떻게 누구도 모르게 또 아무렇지 않게 배신당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PEN에 동참했던 철학자들은 당시 삼성과 관련된 각종 비리 사건, 즉 삼성 X-파일 사건, 삼성 에버랜드 불법 상속 사건, 그리고 결정적으로 김 변호사가 밝히고 나선 삼성의 권력관리 비자금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기 위해 특검의 가동을 요구했었다. 우리가 특검을 요구한 것은 당시 검찰총장 내정자였던 임채진 씨를 비롯해 검찰 고위층 대부분이 삼성의 관리자 명단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김 변호사의 책을 보니 그런 요구는 애초에 그 취지대로 실행될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어느 면에서 특검 요구는 당시 검찰에게 삼성을 수사할 부담을 덜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삼성에게 아주 쉬운 로비 대상을 풀어준 격이 되었다. 삼성과의 관계에서 이해관심이 없을 것으로 기대되었던 특검은 삼성이 아니라 거꾸로 그 고발인 격인 김용철 변호사를 수사하고, 비자금으로 은닉되어 있던 돈들을 이건희 회장 개인 재산이라고 돌려주기도 하였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결국, 정권의 변화와 무관하게, 삼성 특검 수사는 삼성과 이건희 전 회장의 죄를 추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포괄적인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끝났다.("특검은 왜 삼성이 아니라 나를 수사하나"; 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 59~88쪽.)

삼성권력에 일조하는 '나' 자신

이 때 아마 처음으로 210명의 철학자들이 제기했던 삼성 불매 운동의 제안은 그 결말이 더 참담하다. 문제는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나 자신이다. 당시 우리들은 삼성족벌 체제를 응징하기 위해 단지 삼성의 기부금이나 사회적 기여금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아예 삼성 제품 자체에 대한 불매 운동을 시민사회에 제안했었다. 그러나 삼성이 사회세력상으로 별 볼일 없는(?) 철학자들에게 그 어떤 기부금은 애초에 줄 리가 만무한 것이었다. 그리고 삼성 제품 불매도 그 어떤 조직적 활동을 준비했다기보다 일단 삼성에 대해 이런 목소리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시위하기 위한 일종의 경고탄 정도였다. 이 경고탄조차도 제대로 터지지 않았다는 것은 다름 아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그 뒤 생활을 보면 여실하게 입증된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세삼 정신 차리고 꼽아보니 지난 2년 동안 내 집 안에 삼성 제품이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어나 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삼성제품에 대한 단순한 애용자가 아니라 중독자가 되는 증상은 더 심화되었다. 어쨌든 삼성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국산이라서", "품질 좋아서", 또 "AS를 잘 해주니까", "직원이 너무 친절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믿을 수 있어서" 등…. 갖가지 이유로 정신없이 삼성 제품을 사서 써댄 나와 내 가족도 알게모르게 가담한 셈이다.

비천무의 삼성과 승천행의 삼성: "죽지 않으려면 고함쳐야 한다"

▲ 김연아 선수. ⓒ뉴시스
어쨌든 본의 아니게 조기 독서를 하게 된 <삼성을 생각한다>를 주의 깊게 보면서 나는 현재의 삼성에 대해 이제는 정말 내가, 그리고 우리가, 더 이상 그 어떤 조처를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이 시기는 기묘하게도, 비단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겠지만, 삼성이 광고와 스폰서링을 통해 전폭적으로 후원한 김연아의 피겨가 나를 내내 매료하고 있던 밴쿠버 동계 올림픽 기간과 겹쳐 있던 때이기도 했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혹독한 시련이었다.

김연아의 신품 연기를 뒷받침해준 '매력의 삼성'과 김용철 변호사의 진정 어린 목격이 전해주는 '추악한 삼성'의 이미지가 눈앞을 어지럽히는 가운데, 지금 당장이라도 세계 최고인데 그것을 넘어서는 '무결점 삼성'을 생각하려고 애쓴다는 것은 거의 정신적 고문이었다. 김 변호사의의 책이 아니더라도, 비천무를 연상시키는 연기를 아로새겨 2월 26일 감격의 금메달을 따낸 김연아의 신체 위에 바로 한 달 전인 1월 26일 승천행을 선택한 삼성전자 부사장의 시체가 어른거린다는 것은 너무나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삼성 빼놓고 모든 곳에 다 취직하라고 자식들에게 말하는 전직 삼성 직원들이 한두명 아니라는 것도 삼성 생각을 송곳처럼 아프게 만드는 일이다.

나는 비단 한국 사람뿐만 아니라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삼성전자 부사장 자리를 박차고 왜 하늘나라로 날아가는 길을 택했는지 그 앞뒤 사정을 모르겠다. (☞관련 기사 보기) 그러나 이 자살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나온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결국 김 변호사가 살기 위해 참으로 당연한 선택을 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슬몃 웃었는데, 김 변호사여, 용서해 주시기 바란다. 나는 그가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 삼성을 폭로하고 나선 줄 알았는데, 죽음을 택한 삼성전자 부사장과 비교해 보니, 김 변호사의 양심고백은, 알고보니 죽기 싫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정이 그렇다면 누구나 자살하는 것보다 "삼성 쟤 좀 봐요!" 하고 비명 지르고 나오는 게 상책인 것이다. 그래야 죽지 않는 것일 게다.

하지만 그 다음에 따라오는 상념은 결코 웃을 일이 아니다. 우리 대부분이 잘 모르지만, 삼성은 이제 그 안의 그 누구에겐가는 항상 죽음이 어른거리는 직장이 되어 있는 것이다. 돈 벌어서 행복하게 살자고 들어간 직장 생활이, 그 어떤 이유든, 자살로 마감될 수가 있다면, 그런 직장과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삼성의 장점과 업적을 상찬하는 연구서나 글들은 지천으로 쌓아놔도 높은 줄 모르겠으니 그만 두기로 하자. 삼성의 문제는 김 변호사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면 정말 실감나게 인지할 수 있다. 이제 문제는 왜 우리가 삼성을 제대로 생각하고, 방치라도 해서는 안 되는지 그 근거를 우리 자신들에게 진지하게 정리하는 일이다.

삼성권력의 핵심: 자본독재 그리고 '이건희'라는 아이콘

김용철 변호사의 책을 보면 2년 전보다 더 절실하게 삼성이 사실상 우리 대한민국 국가와 사회, 그리고 경제계 전반을 상대로 자신들이 축적한 자본을 휘둘러 일종의 비폭력 쿠데타, 역대 정권에 대한 끊임없는 권력 개입을 하고 있다는 점이 뚜렷해진다. 전국의 삼성 관련 직계 및 방계 기업들은 단지 생산 및 유통을 위한 경제성 조직이 아니라 각 지역별로 지방권력의 말초신경까지 관리하고 감시하는 정보 및 행동 조직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이런 삼성 조직체계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온당한 영리활동뿐만 아니라 모든 법질서를 꿰뚫고 그 위에 군림하기 위해 온갖 탈법적인 행위를 언제든 자행할 용의가 있는 탈법치주의 조직이라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삼성의 이런 탈법성에는 그 어떤 위법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처벌은 물론 단순한 제재도 받지 않으려는 초법성에의 집착이 강력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실 단순한 기업이라면 돈만 벌면 그만이다. 그런데 삼성의 행태를 보면 단지 돈 버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으려는 '독단독재(獨斷獨裁)'의 권력의지가 번뜩이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 어떤 나라의 기업도 자기가 축적한 자본력을 내세워 이렇게 국가를 전방위적으로 말아먹으려는 권력의지를 노골적으로 행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직 삼성만이 그리 절실하지도 않는 사안을 명분으로 대통령의 단독 특별사면을 받아낼 수가 있다. 아니, 이 때 '삼성'이라고만 말하면 인식해태이다. 엄밀하게 말해 삼성권력의 초점에 사실은 '이건희'라는 아이콘이 있다.

'이건희' 아이콘은 그 우수한 인력들이 결집한 삼성의 맨파워 그룹을, 시간만 지나면 인간적으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접스런 부패행각으로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국내에서 단련된 탈법성은 해외에서도 그대로 발휘된다.

해외에서도 권력 휘두르는 삼성, 그 허약한 탈법성

2001년 9월 독일에서 세계 유수기업들의 탈법성과 반도덕성, 반인권성을 낱낱이 파헤쳐 전세계적으로 15만부 이상이 팔려 반세계화의 성전 반열에 오른 <유수기업 흑서(黑書)> (<Schwarzbuch Markenfirmen>, 한국어판 제목은 <나쁜 기업. 그들은 어떻게 돈을 벌고 있는가>)를 지은 한스 바이스와 클라우스 베르너는 핸드폰 제조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탄탈 금속의 원광에 어떤 기업이 눈독을 들이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12개 전자제품 생산업체에 장기 공급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담은 판매제안서를 보냈다.

이 메일에 대해 삼성의 금속 무역담당이 런던에서 연락을 보내 관심을 표명했을 때 바이스와 베르너는 자신들이 취급하려는 탄탈 원광이 "콩고 반군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돌아온 대답은 "콩고의 경제적 혼란이 개입"되어 "반군과의 신중한 거래"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이미 "구리를 콩고에서 들여온 적이 있으며 지역적 인프라 구축과 그것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장 내놓을 탄탈 원광에 대해서는 그 비싼 광물만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을 "시장에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삼성 자체 수요로 전자업 쪽에서 가공될 것"이라는 확답을 들었다. 삼성 쪽에서 보면 참으로 야비하게 보였을 태도이지만, 이 두 저자는 삼성 발신인이 명기된 팩스 수신문과 런던에서 직접 날아온 관계자와의 대담만 채록하고는 더 이상의 연락을 끊었다. 이 사실을 이 두 저자는 "삼성이 걸려들다"라는 소제목으로 기술하고 팩스 원문을 사진으로 공개했다.

국내에서는 용인되는 작태도 진짜 경쟁이나 시민감시가 치열한 해외 시장에서는 크게 걸려드는 수가 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특별 사면한 이건희 회장도 IOC의 중징계는 피해갈 수 없었다. 결국 중범죄인을 사면한 대한민국 최고 통수권자의 체면과 그가 그렇게 중시하는 국격(國格)이 있는 대로 상한 것이다.

결국 이건희란 아이콘에 얽힌 삼성으로부터 그 마법의 줄을 끊기 전에는 삼성의 이미지나 대한민국 국가 브랜드 모두가 경우에 따라서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누가 이 사태를 어떻게 막아야 할 것인가?

'이건희' 아이콘 없는 삼성을 위해: "삼성 제품에 No! 할 수 있는 경제시민으로…"

우리는 김용철 변호사가 자기 인생을 걸고 전해준 삼성 이야기에서 단지 삼성과 그 총수 일가의 알 수 없는 탐욕과 권력욕, 그리고 참으로 갖가지의 기기묘묘한 탈법행태만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19세기 초의 조선 사회를 알려면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봐야 하듯, 21세기 초의 대한민국 사회를 알게 만드는 심층의 비리코드를 내장하고 있다. 그것은 우선 자본독재가 경제적으로 성립화고, 정치적으로 관철될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 공고화된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그것은 좋다는 것은 무엇이나 독점하고, 그것을 특별하게 만들어 수수로를 다른 천한 것들과 끊임없이 특별한 것으로 구별(distinction)하려고 드는 문화자본 행태의 백미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 책에서 보이는 것은 한 명의 천재 덕분에 살아가는 백만 명의 백성이 아니라 노동력뿐만 아니라 인간적 존엄성과 자존심까지도 구기는 25만명의 삼성맨들에게 둘러싸인 한 명의 최강자만 보인다. 더 이상 삼성이 잘 되면 우리 모두가 잘 될 것이라는 이건희 전 회장의 말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자본독재의 일차적 관심은 자본 자신이 사는 것이지 그 어떤 기업이니. 나아가 백성은 더더구나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라디오에서는 현 정권이 들어선 지난 2년간 재벌 기업의 고용자 수는 현격하게 줄었고, 줄어든 피고용자 수의 절반을 삼성에서 주도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삼성전자는 작년에 10조 원을 넘어서는 영업 이익을 올렸다. 삼성이 돈을 벌어도 그 이득을 보는 사람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고품질 뒤에 숨은 저품격의 삼성, 위선의 '이건희' 아이콘을 용인할 수 없다"

'이건희'라는 아이콘이 삼성그룹 전 회장 이건희 씨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이건희' 아이콘은 그런 무소불위의 방자함을 기준으로 권력과 자본만능주의 경쟁판을 만들어온 21세기 초반의 대한민국 시민 전체의 욕망 아니 탐욕을 기반으로 쌓아올려진 이상형이다. 오직 한 명만 '이건희'라는 아이콘을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이건희'가 된 기분에 삼성을 '이건희'에 헌납하고 우리 모두 그 우상 앞에서 순응하는 루저(loser, 실패자)가 되어 왔다. 전도유망한 특수부 검사직뿐만 아니라 변호사 자격증까지 포기하려고 했던 대한민국 시민 김용철만이 이런 자발적이고 순응적인 루저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기 가치에 따라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디자인하는 민주시민이 되기로 결단하였다.

우리 자신이 '이건희 아이콘'에 묶여 그것과 공멸하기 전에, 그리고 이제 단지 소비품이 아니라 권력유인책이 된 삼성 제품에 말려 우리의 삶을 상실하고 그 탈법성과 부도덕성의 공범이 되기 전에 삼성 제품에 No!라고 할 수 있는 경제시민이 되도록 마음을 새로이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아니 그 누구더러 하라고 하기 전에 나부터도 집안에서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삼성제품을 조금씩이라도 다른 제품으로 대체해 나가야 할 것 같다. 어느 면에서 바로 그것만이 '이건희 아이콘'에서 완전하게 해방된 '무결점 삼성'을 만들 수 있는 이 국가 시민으로서의 첫발일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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