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한 논객의 도전 강준만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소통 대한민국’으로 가자 더딜망정 방향은 그렇게 잡자

10여년 전 지방언론을 주제로 한 어느 세미나에서 지방언론의 전망에 대해 비관적인 의견을 말했다가 청중의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무언가 도움이 될 말이 있겠다 싶어 만사 제쳐놓고 참석했는데, 그런 말을 하는 건 무책임하지 않은가”라는 게 비판의 요지였다. 맞다. 그래서 모든 세미나는 적어도 끝날 땐 반드시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청중의 노고에 보답하는 의미에서라도 말이다.

1990년대 거침없는 논리와 독설로 한국 주류·지식 사회의 ‘성역과 금기’에 도전하던 강준만교수는 2000년대 이후 소통의 전도사로 나서 ‘커뮤니케이션 코리아’를 역설하고 있다. |경향신문자료사진

1990년대 거침없는 논리와 독설로 한국 주류·지식 사회의 ‘성역과 금기’에 도전하던 강준만교수는 2000년대 이후 소통의 전도사로 나서 ‘커뮤니케이션 코리아’를 역설하고 있다. |경향신문자료사진

‘소통’에 대해 말하려 하니 그때 생각이 난다. 소통의 전망에 대해 나는 비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잠자코 있지 왜 소통에 대해 글을 쓰는가. 왜 소통이 어려운지 그 이유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게 나의 답이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소통을 죽이는 데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소통을 외치는 일이 무더기로 벌어지고 있는데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 둔감이 바로 소통의 적이라는 걸 널리 알리고 싶다는 뜻이다.

이명박 정권은 소통의 원흉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내 생각은 다르다. 아니 그 이전에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소통을 사랑했던 것인지 그걸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소통은 한국의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에서 한번도 대접받지 못한 개념이다. 선악(善惡)의 대결구도에서 또는 그렇게 믿는 상황에서 소통은 그 어느 쪽에도 미덕이 아니다. 인권과 정의의 편에 선 사람도 오직 강한 신념으로 무장해야지 소통을 시도한다는 건 ‘기회주의자’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우리는 그런 세월을 100년 넘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대중의 일상적 삶에서도 소통은 존중받지 못했다. 연고 중심의 ‘배짱’과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소통을 대체했다. 물론 그게 나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정(情)을 나누고 시간을 절약하는 효율성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의 ‘빨리빨리’가 저주이자 축복인 양면성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소통이 대단히 좋은 것처럼 말하지만, 그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빨리빨리’가 외쳐지는 사회에서 소통은 관료주의적 번문욕례(繁文縟禮)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일을 권력이 신속하고 일사불란하게 밀어붙일 때 뜨거운 박수를 보내지 소통의 과정을 건너 뛴다고 비판하진 않는다. 우리가 소통을 외칠 땐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일을 권력이 밀어붙일 때다. 즉, 우리 사회에서 소통은 이미 이념·정략에 오염된 개념이라는 뜻이다. 이명박 정권이 소통의 원흉이라는 판단을 내리기 위해선 그 이전의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정권 탄생에 표를 던지지 않은 유권자들과 소통을 했던가 하는 판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쉬운 일 같지만, 의외로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옳다 그르다’의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가치를 강하게 내세우면서 소통의 대상과 의제를 차별하는 순간 소통은 무너진다. 정권별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소통은 우리 모두의 문제로 돌리는 게 옳다. 크게 보아 7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겠다.

첫째, 승자독식주의다. 승자가 독식을 하는 체제 하에선 소통은 미덕이 아니다. 전혀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무조건 이기면 되는 것이지, 소통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선거란 헌법이 보장하고 국가가 공인해주는 승자 독식의 도박 축제다. 정치라는 도박산업이 관장하고 있는 인적·물적 자원의 양을 대폭 빼앗아 시민사회의 자율 영역으로 돌리지 않는 한 소통은 계속 쓰레기 취급을 받게 돼 있다.

둘째, 초강력 중앙집권주의다. 한국정치의 최대 특수성은 두말할 필요 없이 ‘서울 1극 구조’다. 이건 서양 정치이론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한국적 현상이다. 한국 정치에서 미디어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인들은 정당 등의 매개조직을 경유하지 않은 채 미디어를 통한 ‘직거래’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풀뿌리 소통’이 없는 가운데 미디어 장악을 놓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게 한국 정치의 주요 업무다.

[한국, 소통합시다](4)한 논객의 도전 강준만

셋째, 서열주의다. “나는 무엇이다”보다 “나는 어떠해야 한다”에 집착하는 한국인들은 말로 소통하는 게 아니라 서열과 등급과 계급으로 소통한다. 서열의 내면화로 인해 출세주의가 만연해 있고, 이는 공적 영역에 대한 불신을 가져와 소통을 이중으로 어렵게 만든다.

넷째, 지도자 추종주의다. 세가지 이유가 있다. (1) 고난과 시련의 역사로 인한 ‘영웅 대망론’이다. (2) 이념과 같은 추상보다는 사람에 더 잘 빠지는 체질과 더불어 한번 마음 주면 웬만해선 돌아서지 않는 의리·정 문화다. (3) 지도자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모든 걸 빨리 해결하고 싶어하는 ‘빨리빨리 문화’다. 대중의 소통권은 지도자들에게 헌납된 가운데 지도자의 ‘오빠부대’로만 기능하는 사회에서 소통이 가능할 리 없다. 지금 우리는 지도자 추종주의 자체를 문제삼을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지도자만을 바라보며 추종하거나 탓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다섯째, 극단주의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최대형의 의도와 최전선적 논리’에 집착하고 이에 따라 갈등세력 강경파들 간의 ‘적대적 공존’이 발생한다. 소통을 근거로 합리적·생산적 경쟁체제를 꿈꾸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들은 파편화돼 있어 조직화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참여에 대한 반대급부로 줄 게 없기 때문이다. 공직을 줄 수도 없고, 다른 인정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도 없고, 통쾌하고 후련한 ‘카타르시스’도 주지 못한다. 특정 이념·노선·당파성을 내세워 지지자들의 피를 끓게 만드는 탁월한 논객들은 많지만, 소통을 외치는 논객이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여섯째, 이념의 사유화다. 자신이 내세우는 명분과 이념에 대해 조금만 신축성을 보이면 전체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반대편의 명분과 이념을 갖고 있는 사람과의 소통은 물론 타협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명분·이념에 자신의 사적 이익을 다 걸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적 이익은 넓은 개념이다. 자신이 주도해서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인정욕망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런 인정욕망은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승리를 갈구하는 마음으로 나타나는데, 실제로 이게 ‘소통 죽이기’의 주요 토대가 된다.

일곱째, 각개약진(各個躍進)이다. 각개약진이란 적진을 향해 병사 각 개인이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개별적으로 돌진하는 걸 뜻하는 군사용어다. 각개약진은 한국적 삶의 기본 패턴이다. 공적 영역과 공인에 대한 불신이 워낙 강해 사회적 문제조차 혼자 또는 가족 단위로 돌파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는 뜻이다. 심심하면 벌어지는 집단적 열광의 비밀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집단적 열광은 각개약진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한 집단주의 축제다. 카타르시스가 목적일 뿐 소통이 설 땅은 없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은 구조적으로 소통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회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사회가 소통이 어렵기 때문에 얻게 되는 ‘수익’이 있다는 것도 바로 보아야 한다. 한국인들은 합리적인 소통 가능성을 아예 포기했기 때문에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는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을 수용해 각개약진형 경쟁에 임하고 있다. 속된 말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속설을 신봉하는 것이다. 대학입시 전쟁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기존 경쟁체제를 옹호하는 보수파들의 세계관이 바로 사회진화론인 셈이다. 물론 그걸 ‘수익’이라고 볼 수 있느냐 하는 반론은 가능할 것이나, “개인 실력으로 소통하라”는 인생관이 낳는 사회적 효과도 외면하지 않아야 이 문제에 대한 논쟁적 소통도 가능하다는 건 분명하다. 즉, 우리 사회가 약자들에게 가혹한 건 특정 권력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의 귀결이라는 걸 바로 보자는 뜻이다.

‘소통 대한민국’으로 가자. 더딜망정 방향은 그렇게 잡자.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방향조차 그쪽으로 틀지를 못했다.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생각은 잠시 접자. 서로 충돌하는 모든 집단들이 각자 다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선거 민주주의’를 하지 않겠다면 모를까, 그걸 하기로 한 이상, 또 그걸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이상, 이젠 달리 생각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미우나 고우나 더불어 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누가 옳건 그르건, 그 누구도 완승(完勝)은 가능하지 않으며, 누가 이기건 승자 독식주의는 나라를 망치는 짓이니, 소통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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