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짜 반항아 '10억분의 1' 사나이 된 사연

2012. 3. 6.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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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 중국, 또 한번 한국보다 빨랐다

최근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건축상인 프리츠커 상 수상자로 왕수라는 젊은 중국 건축가가 선정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좀 잘나가는 건축가는 거의 모두 해외 유학파 출신인데, 이 왕수는 중국 건축가는 유학 경력도 없는 중국 토종건축가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가장 중심지인 베이징이나 상하이가 아니라 남쪽 항저우에서 주로 활동하는 이였습니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이제 48살. 70대나 80대까지도 활동하는 건축가들의 직업 수명에 견줘보면 아직 젊은 소장파입니다. 특히 프리츠커상이 그동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가 건축가들에게 상을 줘왔던 점을 감안하면 충격이었습니다. 프리츠커상은 흔히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립니다. 아직까지 아시아에선 유일하게 일본만이 이 상을 받았고, 한국은 아직 수상자를 배출 못 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이 한국보다 먼저 이 세계적인 상을 거머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건축가인지 작품을 살펴봤습니다. 보시지요.

▲ 상하이 부근 도시 닝보에 있는 역사박물관 형태는 분명 아주 현대적인데 딱 보기에도 중국적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건물에 쓴 재료들이 중국 전통 벽돌 느낌을 풍기기 때문입니다. 직하고 웅장한 디자인이 힘이 넘칩니다.

한동안 중국 건축은 한국보다 뒤져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다 보니 중국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설계집단들이 건물 설계를 맡아서 했습니다. 그러다가 10여년 전부터 개별 건축가들이 건축을 시작했으니, 한국보다 현대 건축 출발이 한참 늦었습니다. 그런데 프리츠커를 중국 건축가가 먼저 받았으니 놀라웠던 것입니다.

특히 그동안 프리츠커상은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스위스 등 철저하게 서구 쪽에 집중되어왔습니다. 건축에서 일본은 일찌감치 선진국에 올라섰으니 논외로 쳐야겠고요. 그래서 왕수의 수상은 비서구권 수상자란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 항저우에 있는 중국예술아카데미 캠퍼스 그의 건축물들을 살펴보니 중국 전통과 현대 건축을 접합시키는 작품 세계가 두드러졌습니다. 중국 전통건축은 우리와 달리 벽돌 건축이 발달했습니다. 회색빛 벽돌을 쌓아 만드는 외관 이미지가 중국 건축의 대표적 이미지인데, 왕수는 이런 전통을 과감한 디자인과 섞어 효과적으로 자기 건축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의문이 남는 것은, 젊은 이 중국 건축가가 순식간에 세계 대표급으로 떠오른 배경과 원동력입니다. 물론 중국에선 자국을 대표하는 신예로 자리잡았지만, 세계 건축계에서 왕수는 아직 많이 알려진 이는 아닙니다.

어떻게 그는 이런 성취를 젊은 나이에 이룬 것일까요?

# 성장과정, 그리고 부모의 영향이 괴짜 스타 건축가를 낳았다

이력과 자료를 보니 조금 이해가 되었습니다. 왕수는 중국의 가장 끝쪽인 신장 우르무치 출신이었습니다.

딱 보기만 해도 중국사람 같은 저 왕수의 아버지는 음악인이자 아마추어 목수였고고, 어머니는 교사이면서 서였습니다. 직업인이면서도 또다른 자기 세계를 추구하는 부모의 스타일은 왕수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왕수는 어려서부터 부모들에게 자극받아 온갖 물질과 재료들, 그리고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공예, 그리고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 진화에 있는 세라믹 하우스 왕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요인은 `여행'이었습니다.

낭만적이고 우아한 그런 여행은 전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집이 중국 변두리 우르무치여서 수도인 베이징까지 기차를 타고 오갈 일들이 있었는데, 이 기차 안에서 그는 훗날 건축가가 될 묘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우르무치에서 베이징까지는 무려 4000킬로미터. 털털거리는 기차로 4일 낮, 4일 밤을 꼬박 가야하는 이 코스를 오가는 과정에서 예술에 대한 아무런 스승도 없었던 그는 기차 창밖 풍경과 자연의 변화를 보면서 혼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경험이 나중에 그를 예술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재미있는 일화도 있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동네 집 정원과 좁은 골목 담 등에 그림을 그렸는데, 마을 사람들에게 낙서를 했다고 욕을 먹기는커녕 사람들은 왕수가 떠난 뒤에도 다시 왕수가 돌아올 때까지 그림을 남겨두었다고 했다고 합니다. 아주 그림을 잘 그렸던 모양입니다.

왕수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어 준 부모였지만, 나중 그가 대학에 진학할 때 부모는 세상이 얼마나 먹고살기 힘든지 아느냐며 과학이나 공학으로 진로를 잡으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왕수는 난징 공대에 들어갔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길을 만납니다. 물론 건축이었습니다. 예술과 이어지는 공학은 당연히 디자인과 건축뿐이겠지요.

# 당차고 기발했던 졸업 이후 행보-후퇴 뒤 전진이 그를 만들었다

그런데 자료를 보니 진짜 흥미로운 점은 그의 자기 경력 관리(?)였습니다. 그는 남들 다 좋다는 엘리트코스, 모범 답안을 결코 따라가지 않고 청개구리처럼 반대로 갔습니다. 자기의 뚜렷한 주관과 계획을 고집하며 경험을 쌓았던 것입니다.

▲ 닝보의 역사박물관 벽. 재료 자체의 느낌과 특징을 강조했다. 왕수는 1990년부터 1998년까지, 그러니까 건축가로 막 출발해 가장 왕성하게 배우고 일하고 성장할 10년 가까이 건축 설계를 수주받아 일하지 않고 다른 선택을 합니다.

매일 아침 8시부터 한밤중까지 그는 각종 장인들과 먹고 자면서 함께 작업장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중국에선 무척 하위 계층으로 여기는 이들과 함께 말입니다. 이 과정 속에서 그는 `만든다는 것'을 깨우쳐 나갔습니다. 나중 건축의 모든 과정에 적용될 기술들을 현장에서 공부한 것입니다.

▲ 항저우 중국예술아카데미 캠퍼스 그가 이렇게 오랜 세월을, 사회에 처음 나가 출발하는 가장 귀중한 시기에, 몽땅 쏟아부은 것은 중국의 오래된 전통 건축물들을 새롭게 혁신하고자 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물론 지금도-에 중국에선 많은 전통 건물들이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 헐리고 있었고, 작고 평범해서 소중한 옛집들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너무 흔해서 소중함을 몰랐던 것이겠지요. 그는 이렇게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전통 건축물의 구조와 재료, 공법을 탐구해나갔습니다.

남들이 가는 길과 전혀 다른 코스로 홀로 간다는 것은 웬만한 확신과 자신감과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것을 독하게 해낸 것을 보면 왕수의 성격은 무척이나 한 고집 한다고 봐야겠죠. 1980년대 왕수는 베이징에서 열린 한 건축 콘퍼런스에 가서 한바탕 논쟁을 벌인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가 "중국에는 건축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었는데, 분명 당차고 겁없는 젊은 건축도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대학 시절부터 건축만 파고든 게 아니라 미술사를 열심히 공부했다고 합니다. 중국 미술만이 아니라 유럽은 물론 북미와 아프리카 미술까지, 그리고 고미술과 현대미술 모두를 섭렵했다네요. 그리고 철학과 문학, 인류학, 영화에 심취했다고 합니다. 폭넓은 인문학 공부로 훗날 건축의 자기 철학을 만들기 위해 광범위한 부분을 연구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다양한 관심은 항상 중국의 지역적 상황에 맞춰져 있었고, 이를 폭넓은 비전과 사려깊은 생각으로 반드시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에 꽂혀있었습니다.

▲ 항저우 중국예술아카데미 캠퍼스 도를 닦듯 9년 세월을 설계 대신 현장 공부로 보낸 뒤 드디어 1997년, 왕수는 역시 건축가인 아내 루원유와 함께 자기 설계사무소를 차립니다. 그 이름이 실로 인상적입니다. '아마추어 건축 스튜디오'.

# 재활용으로 역사를 이어가는 건축

내공을 깊게 닦은 덕분이었는지 이후 왕수는 이름을 알려나가게 됩니다. 전통과 현대의 올바른 접목을 추구하는 건축가로서 왕수는 늘 도시 속 파괴와 변화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우리는 결코 발전이란 명목으로 역사를 파괴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그의 철학을 잘 보여줍니다. 이후 그의 대표작이 된 닝보 역사박물관(2004)을 보면 이런 왕수의 건축 지향이 잘 드러납니다. 왕수는 헐리는 전통 가옥에서 나온 폐자재를 재활용해 역사와 기억을 새 건물에 간직하고자 했습니다. 닝보라는 항구도시에 사는 시민들에게 그들의 삶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려는 것이 디자인의 의도였습니다.

중국예술아카데미 항저우 샹산 캠퍼스를 지을 때에는 철거하는 전통 주택에서 나온 기와 200만장을 가져다 썼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장인들과 함께 수공예적인 기법과 전통을 지켜봐 온 그의 건축 설계 과정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그는 자기가 디자인하는 과정이 중국 전통 화가들의 작업과 흡사하다고 설명합니다. 설계 전에 먼저 건물이 들어설 도시를 연구한답니다. 특히 산세와 계곡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에 대해 일주일 정도 꼬박 생각만 하는 단계로 들어갑니다. 아무런 스케치조차 하지 않으면서. 닝보 역사박물관을 지을 때도 이러했다고 하는데, 그 다음 하루 정도 밤을 새서 고민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건물 디자인이 머릿속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그는 바로 그 순간 연필을 들어 단숨에 설계의 거의 모든 것을 그렸다고 합니다. 심지어 숫자나 구조, 각 공간의 넓이까지, 그리고 입구의 위치며 기능들도 함께 말입니다. 그 다음 그는 차 한 잔을 마셨다고 "그 다음" 그는 말합니다. "저는 차 한 잔을 마셨습니다" 라고요.

▲ 왕수 건축의 특징은 새로 지어도 몇십년 된 듯한 느낌을 주는 점이다. 장소의 역사와 재료를 이어가기 때문. 그는 2003년 항조우에서 중국예술아카데미 교수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게 됩니다. 항저우 캠퍼스가 그의 대표작이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이 왕수가 인터뷰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너무 규범적이고 정통적이고 전통적이어서 건축 전공자들에겐 좀 질릴 법한, 그러나 영원히 반복될 수밖에 없는 말일 텐데, "건축은 일상 삶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터뷰할 때 '건물(building)'이란 말 대신 반드시 '집(house)'이란 단어를 씁니다.

▲ 전통 기와를 재활용해 벽에 지붕 디자인 외피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는 디자인(설계)이란 아마추어 활동이며 생활이 디자인보다 중요하다는 지론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장인이 되는 것은 아마추어가 되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말합니다. "전문적인 건축의 문제 중의 하나는 건물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네 단순하고 사소한 삶에 가까운 집이란 것은 건축보다 더 근본적이에요."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기술보다 더 중요하다고 철저하게 믿는 소신도 이런 철학의 산물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건축가들의 기술, 예술, 디자인, 공간관과 분명 왕수의 생각는 다릅니다. 건축가로 성장해온 과정도, 이력도 다른 이 젊은 중국 건축가가 프리츠커 메달을 거머쥔 데에는 인문학적 사유와, 도시와 자연에 대한 이해, 그리고 중국 전통의 미학을 '오래된 미래'로 가져와 쓴 도전 정신의 덕분이었을 겁니다.

# 과연 그는 대가 수준인가?

왕수의 건물을 물론 가보지는 못하고 이미지로만 보면서 든 생각은 '이건 중국에서만 가능한 건축'이란 것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인건비'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 기왓장을 200만개씩 모으고, 옮기고, 건물에 올리는 일은 재료비의 문제가 아니라 인건비의 문제입니다. 아직도 건설 노동력 임금이 다른 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게 저렴한 중국에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한국에서 저렇게 기와를 붙이는 디자인을 했다면 건축가는 아마 건축주한테 쫓겨날 겁니다. 시공비가 엄청나게 올라갈 테니까요. 우리 건축가들로선 하고 싶어도 못할 시도라고 하겠습니다.

디자인은 어떤가요? 분명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표급 건축가들과 수준 차이는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프리츠커가 왕수를 고른 것은 그가 '중국' 건축가란 점에 있을 겁니다. 실제 프리츠커 발표 자료를 보면 왕수의 이야기에 앞서 '중국'에 대해 언급합니다. 중국은 지금 그 어떤 나라보다도 빨리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고, 그 도시들이 보다 살기 좋고 의미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에 힘을 실어주자는 이야깁니다.

맞는 말입니다. 중국의 도시에 대한 왕수의 생각은 그런 점에서 가산점을 얻었을 겁니다.

그러나 분명 중국이 세계 최대의 시장이자 떠오르는 강국이란 점이 그 배경에 깔려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 건축계의 빠른 성장도 그들이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이번 심사위원을 보면 중국의 대표적 건축계 국제 인맥으로 베이징대 교수에서 MIT 교수로 자리를 옮긴 장융허가 들어있는 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 2010년 상하이 엑스포 닝보관. 전통 소재와 전통 디자인 모티브로 중국 자연을 형상화했다. 어찌됐든 왕수의 수상은 비유럽권 건축으로 세계 건축의 관심이 더 높아지는 경향을 대변하고, 그런 점에서 한국 건축에도 희망을 줍니다. 동시에 중국이 먼저 세계적 인정을 받아냈다는 데 대한 아쉬움과 허탈감도 줍니다. 또한, 건축에서도 차이나 파워 시대가 오느냐는 성급한 예상도 하게 만듭니다.

개인적으로 든 생각은, 우리에겐 우리 전통 디자인을 현대 건축과 접목시키는 것이 다소 식상하고 또 강박처럼 느껴지지만, 외국의 눈에는 신선하고 특별한 것으로 비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한 것입니다. 이른바 버내큘러 디자인, 곧 그 지역의 특색을 드러내는 디자인이 갖는 국제적인 힘인데, 지금 우리 건축계에서는 이런 흐름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과거 박정희~전두환 시절, 전통을 반드시 형상화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압박에 건축계가 진절머리난 탓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일급 건축가들은 지금껏 최대한 미니멀한 건축, 세련된 건축을 지향해왔습니다. 그러나 외국 건축계의 눈에는 한국적인 특성을 지닌 개성적인 건축이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 있어도 비슷할 그런 건축, 서구 건축의 아류로 비칠 겁니다.

결국, 고민은 한국적인 건축 디자인의 문제입니다. 왕수 같은 건축가, 개성적이고 자기만의 세계를 뻔뻔할 정도로 과감하게 드러내는 건축가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우리 건축 생태계가 보다 개방적이고 건전해져야 합니다. 지금 한국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공공건축은 디자인의 차별화보다는 흠 없이 무난한 거지같은 건물들을 더 선호합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건축주인 관과 민 모두 선호하지 않습니다. 건축보다는 시공에 관심이 많은 탓입니다. 그래서 건축가가 오히려 시공 건설회사 밑에 들어가 팀을 이뤄 한꺼번에 처리하는 턴키(일괄입찰) 방식이 성행합니다. 이래서는 왕수 같은 새로운 건축가가 절대 나오지 못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우리 건축가를 욕하기 전에 건축주인 우리 사회의 구조적이고 고질적인 문제를 먼저 욕해주시기 바랍니다. 학교가 바뀌지 않는데 학생보고 새로워지라고 요구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한번 생각해보시면 한국 건축의 문제도 이해가 되실 겁니다.

구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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